당신은 붉은모자 멜라콩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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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10.22(목) 17:34
기획특집
당신은 붉은모자 멜라콩을 아시나요?
역무원 멜라콩 박길수씨, 선천적 소아마비로 천성이 긍정적이고 부지런해
목포역서 화물 운반해 주는 짐꾼으로 빨간모자를 쓰고 근무… 별명 얻어
목포역 옆길 넓고 긴 하천때문에 상인·주민 불편… 사비 털어 재료 구입
그의 정성에 감동해 성금 모아져… 1964년 4월 20일 ‘멜라콩 다리’ 완공
한해 착한일 하나씩 하는 일년일선(一年一善) 다짐… 선행은 쭈욱 이어져
그의 삶 KBS논픽션 드라마 제작… 윤홍식PD 백상 예술대상 신인상 받아
1994년 67세로 작고… 멜라콩 다리 공적비 목포역 담장 속에 묻혀 안타까워
  • 입력 : 2024. 09.02(월) 17:29
목포역 담장속에 묻혀있는 공적비.
역무원 멜라콩 박길수씨는 1928년 전남 장흥군 대정면 평촌리에서 박권섭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선천적인 소아마비와 손발이 떨리는 증상, 입이 틀어져 어눌한 말투에다 외소한 체격등 중복장애를 타고 났지만 천성이 긍정적이고 부지런했다.
박길수씨가 열 두살때 큰형의 오랜 병환으로 살림이 어려워지자 그의 가족은 고향인 장흥을 떠나 목포로 나와 역앞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목포역 대합실에 노숙하며 틈틈이 부모 일을 돕던 박씨는 자발적으로 역내 청소를 열심히 하는 등 근면 성실함을 인정받아 목포역 정모의 조수로 고용된다.
정모는 기차에 실어 온 화물을 대합실의 손님에게 운반해 주는 짐꾼으로 보통 빨간모자를 쓰고 근무하여 아까보라고 불렀다. 박씨가 멜라콩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중증장애에도 불구하고 늘 웃는 모습이 사무라이 영화의 등장인물 멜라콩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목포역은 1913년 5월 15일 호남선의 목포-학교간으로 개통되었다. 호남선 부설 당시 약 10만평의 바다를 매립해서 조성된 역사 주변은 복개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개흥이기에 바닷물에 빠지면 물이 빠지고, 바닷물이 들면 물이 차고 빠져 시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다.
그 당시 목포구도심 간첩사업을 통해 조성된 곳으로 일제강점기 금융가가 발집되어 있는 선창을 위시하여 목포역을 중심으로 주요 상권이 형성되었으나 역사 주변에는 하수로와 갯벌이 그대로 있어 안쪽으로 물이 들어 왔다. 남교동 주문통으로 뻗어 있던 갯고랑이 한국통신 앞에서 역전 광장을 돌아 동명동 앞바다로 들어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도 목포역 옆길(역전파출소에서 우성아파트 방향)은 복개 되지 않은 넓고 긴 하천이 흐르고 있어, 인근 사람들은 목포역으로 가려면 5백여미터 가량을 돌아서가야 했다. 특히 하천 건너편인 동명동 어시장을 이용하는 상인과 주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해산물을 팔아서 먹고 사는 보따리 장사들이 기차를 놓쳐 발을 동동 구르거나 기차 통학 학생들은 지각을 빈번히 하게 되고 목포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과 직접 기른 농산물을 새벽녘에 나와 팔다 아침이 되면 파장하는 도깨비시장 상인들의 불편도 뒤따랐다.
이를 보다 못한 박길수씨는 직접 목포시청을 찾아가 다리를 놓아줄 것을 애원했지만 예산이 없다고 거절당하면서 정신이상자 취급까지 받게 됐다.
이후 박길수씨는 직접 다리를 놓기로 결심하고, 모금운동에 나섰다.
자기 몸도 성치 않은 주재에 꼴깝을 떤다는 비웃음과 비난이 빗발쳤다.
게다가 역사 주변 상인들은 다리가 생기면 사람들이 자기네 상가를 지나치지 않아 영업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박씨를 집단 폭행하며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비를 털어 다리공사에 필요한 철근과 시멘트를 직접 구하러 다녔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이들이 하나둘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영화필름 배달일로 안면이 있는 남일극장 김재영 사장을 비롯해서 목포역 근처 사창가 아가씨들도 성금을 보냈다. 마침내 그의 나이 36세가 되던 해인 1964년 4월 20일 다리가 완공됐다. 박씨는 사비 60만원을 털어 만든 다리를 사람들은 멜라콩 다리라고 불렀다.
통나무를 세우고 구멍 뚫린 철판을 깐게 전부였지만 지름길로 날듯이 목포역을 드나들게 된 사람들에게는 더 할 나위없이 소중한 다리였다.
그로부터 한해에 착한일을 하나씩 하는 일년일선(一年一善)을 다짐한 박씨의 선행은 쭈욱 이어진다. 당시 목포역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화물보관소가 없어 장보따리와 짐꾸러미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박씨는 이들을 위해 사비 4만원과 기부금 1만2천원을 들여 1965년 3월 31일부로 화물보관소를 만들고, 1967년에는 20평 규모의 무료 숙박시설도 만들었다.
이곳에는 박씨의 사비 5천만원도 들어갔다. 목포역의 보안관을 자처한 멜라콩 발길수씨는 평소 역사를 배회하는 떠돌이 소년들이 깡패들에게 구타를 당하면 이들은 자기 숙소로 데려다 치료해주고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나온 섬처녀들이 인신매매단에 붙잡히면 필사적으로 구출해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추위에 떨며 대합실에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떠돌이 소년들을 그냥 지나지 못한 박씨는 그들을 무료합숙소에 재우며 국수를 삶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부장 아들이 모닥불을 피우며 놀다 화물을 불태웠을때도 박씨가 화물주에게 대신 변상해주며 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멜라콩 다리 완공과 함께 대통령과 목포시장, 역장, 인권옹호회등으로부터 많은 상장과 부상을 받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때의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1986년 7월 박길수씨는 소화물을 운반하던 중 실수로 다리가 골절되어 기존의 업무를 못하게 되지만 목포역 소화물 취급소 노조원(박영순 분회장 등 32명)들의 배려로 화물포장등 가벼운 일을 맡게 된다.
평소 그는 몸이 불편해 수입이 적어도 고객에게 팁을 요구하지 않았고 돈지갑을 발견하면 꼭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40여년 동안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인 목포역을 지켜 온 박길수씨는 2남 3녀의 자식들을 보란 듯이 잘 키워냈으며, 그의 지난 삶은 목포문화원 추천으로 KBS논픽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1989년 1월 7일 밤 10시30분부터 60분간 전국에 방송된 “멜라콩을 아시나요”는 윤홍식PD가 연출했는데, 그는 이 작품으로 백상 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퇴직후 부인과 함께 노년을 보내던 박씨는 1994년 67세의 일기로 작고했으며 멜라콩 다리는 1970년대 복개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때 세워졌던 멜라콩 다리 공적비가 목포역 담장 속에 묻혀 있어 시민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멜라콩 박길수씨는 표지석에 새겨진 문구처럼, 불편함을 넘어선 노동의 신성함을 자부심으로 앉고 세상을 살아간 참된 인간이다.
김정헌 대기자 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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